2011.09 Culture Ocean “포스트 – 가이아를 위한 전주곡” by 이재준

 

 

포스트-가이아를 위한 전주곡
A Prelude for Post-Gaia
이 재 준(디지털 미학)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남동을 거쳐 서울대병원으로 가는 곧게 뻗은 도로 양편에는 의수와 의족을 파는 상점들이 여럿 있었다. 오래되어 탁한 쇼윈도우 안으로 동강난 채 널려있는 핏기 없는 손과 다리들. 이것들은 왠지 모를 매력을 발산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자극적인 두려움도 불러왔다. 흔히 알고 있듯이 감정과 함께 떠오른 기억이란 일일이 기술되긴 힘든 반면에 그 자체로는 매우 강렬하며 또한 직접적이다. 감정의 이 직관적 위력은 먼 과거의 단편을 일순간에 눈앞으로 끌어내곤 한다.그런데 이 아이러니한 감정들의 모호한 혼합은 단순히 일상적인 경험의 결과가 아니라, 어쩌면 현대인들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수백 년 동안 학습해온 탓인지도 모른다. 즉, 기계의 운동 잠재력이 자신의 물리적 크기를 넘어설수록 그리고 그 크기와 상관없이 더 섬세해질수록 점증하는 미래 삶에 대한 전망은 더 없이 낙관적인 것으로 변한다는 점. 쉬지 않고 자기 동일성을 스스로 증명하려드는 인간은 ‘살아있지 않은 타자(즉, 죽은 것)’에 의존해서 자신의 ‘살아있음’을 연장하려는 프로스테시스의 욕망을 실현하는 매순간마다 자기 훼손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 이와 관련해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모순적인 혼합의 감정 자체가 이제는 일상에서 쉽게 잊혀진다는 사실이다. 우리 경험은 일상의 수많은 미디어 기계에 장악되어 반복적으로 대리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조야한 인조피부를 하고 그로테스크한 목소리로 말하는 ‘불편한 장치들’이 오랜 동안 한낱 텍스트에 불과했던 기억의 상자를 다시 열어보게 한다.수년 간 노진아는 ‘인간과 생명과 기계, 그리고 간간히 인간 실존’라는 제법 진지한 주제를 건드려왔다. <넌 타이핑해, 난 말할게(You Type, I’ll Talk)> (2004)와 <제페토의 꿈(Geppetto’s Dream)>(2010)은 문자와 목소리라는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인간과 기계의 상호침투 과정을 탐색하고 있다. 관객은 키보드를 타이핑하고 인간의 형태를 한 로봇은 그것에 목소리로써 대꾸한다.존 설의 ‘중국어 방’(chinese room argument)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업에서 눈여겨보아야할 것은 (거친 표현이긴 하지만) ‘과연 말하는 로봇에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기계의 전도된 관계이다. 요컨대 거친 목소리와 제시될 답변의 제한된 가지 수에도 불구하고, 이 인공물은 관객의 타이핑 행위와 더불어 인간의 유기체적 지위를 가로채 선취해버린다. 왜냐하면 타이핑을 통해 우리는 문자화된 정신의 기호화 과정으로 환원되는 반면 그에 반응하는 기계는 목소리라는 감각적이며 육체적인 그래서 더 실재적인 존재로 전치되기 때문이다. 이 작업에서 우리는 무의지적 상태에서 기계에 의해 전도된 관계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2005년 작품 <나는 오믈렛입니다!!!(Je Suis L’hommelette!!)>는 인간의 이러한 훼손감과 상호침투의 상황을 더욱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여기서는 포스트휴먼에 대한 불안의식을 직접적으로 전면에 내세운다.터져버린 머리통과 압도적인 눈알이라는 정신세계의 상징물로부터 정체불명의 인공물이 쏟아져 내린다. 그 인공물은 인체의 직접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그 혹은 그녀의 탄생을 유기체의 메타포로써 경험한 관객은 물질적 실체를 남겨둔 채 옆방으로 건너가 어두운 정신의 공간에서 그 인공물의 실체와 대면한다. 마치『뉴로맨서』에서 케이스가 매트릭스의 AI시스템 윈터뮤트(Wintermute)와 만나 나누는 대화처럼 존재에 대한 제법 진지한 내러티브가 흘러나온다. 이 공간에서 정신화된 인공물은 인간 관객에게 전자적 접속을 통해 자신과 하나 되기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타이핑>과 <제페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미 관객은 타이핑의 노고를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코드화를 자발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지능적인 인공물을 모방하고 있는 노진아의 주인공은 유혹적인 목소리로 관객 자신과의 동일성을 노골적으로 선언한다.그러나 그것은 세포분열과 같은 생물학적 변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면서 사실상 유기체와의 간극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오믈렛>과 <제페토>에 등장하는 ‘노진아의 불편한 기계’들과 대화를 이어가면 어느새 ‘유기체의 생명 메커니즘’과 ‘코드화된 전자적 추상 기계의 메커니즘’ 사이에 남아있는 긴장은 해소되지 못한 채 영영 유보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몸뚱어리 없는 대화>(2005), 그리고 <엄마(mother)>(2008)는 이전 작업들에서 다루었던 생명 화두의 추상성에서 벗어나 어떤 실존적 의미를 획득하는 계기를 맞은 듯하다. <몸뚱어리 없는 대화>는 이전 작업들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조금 다른 양상으로 제시된다. 이 작품에 사용된 ‘도마’ 위의 ‘토실토실한 베이비 머신’과 그 옆에 놓인 끔찍한 ‘식칼’은 여성 전유의 문화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를 구성한다. 물론 <몸뚱어리 없는 대화>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대화라는 기본 형식을 고수한다. 그렇지만 기계와 인간의 전자적 접속과 상호침투의 화두는 막후로 숨는다. 그 대신 노진아는 이 작업을 통해 비로소 생명의 구체적인 실존에 대한 고민을 앞으로 내세운다나는 생명이라는 것이 ‘기계와 인간의 역전된 관계’로도, ‘정신과 신체의 분열’로도, ‘가상과 실재에 대한 이론’으로도 이해될 수 없을 만큼 큰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생명은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서보다는 살아있는 개체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통찰되고 더 잘 이해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런 것 같다.화려하게 꿈틀거리는 동양식 문양을 배경으로 귀여운 아이가 서있다. 그의 눈동자는 나를 따라 응시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아이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가 속이 텅 비어있다. 그렇지만 아이의 타버린 가슴은 우리 눈에 보이는 그 끔찍함 이상으로, 제목에 적혀있는 ‘엄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더욱 증폭시킨다. 작품 <엄마>에서도 엄마와 아이의 이 역설적 상황은 생명이라는 화두가 노진아에게 개념적인 무엇이 아님을 말해준다.엄마와 아이는 생물학적 생식과 증식으로 탄생한 가장 유사한 개체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기체적 상호작용의 역사적 화석일 뿐인) 사회적 선입견은 이러한 생물학적 관계보다 더 강력하게 유사성을 이 두 사람 모두에게 강요한다.그러나 아이와 엄마는 서로 다른 유기적 개체일 뿐이며, 양자 사이에는 엄밀한 불가이해의 처절한 단절이 존재한다. 엄마의 생과 아이의 생에 공동으로 할애된 시간과 공간만이 이 단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서로에게 익숙해지는(coupling) 공명을 받아들이게 한다. 엄마는 자라나는 아이로부터 비로소 엄마와 아이가 서로 다른 개체임을 알게 되고, 아이는 성체가 되어야 그것을 실현한다. 우리의 문화는 이미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개별성과 강제된 사회적 유사성 사이의 수많은 이야기를 남겨놓았다. 노진아의 <엄마>는 그런 문화의 또 다른 흔적이다.2007년 이후 <미생물(未生物: Atoscopic-Inanimate Organism)> 시리즈에서는 이전 작업들의 실존적 의미들과 더불어 또 다른 전회가 엿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표현 매체의 표면적 변화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 화두에 관한 수년간의 물음에 답할 수 있을 커다란 이야기와의 만남을 예견하는지도 모르겠다.전작들이 ‘로봇 인공물과 인간 사이의 전자적 접속에 의해 정보화된 몸’과 ‘기계화된 자아’로부터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미생물>은 무기물을 의사유기물로 변형시킴으로써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다가가려 한다. 이 작업을 통해 노진아는 거대한 생명 세계 내의 관계성에 관한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미생물>의 또 다른 시리즈에서는 사람 허리 높이쯤 되는 긴 목의 인간 머리들이 전시장 바닥에서 말미잘 촉수처럼 흔들거리고 있다. 도대체 이 기괴한 조형물은 무엇일까? 관객들은 전시장 한구석에 설치된 현미경을 조작함으로써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이 현미경은 백경분의 일 단위 크기의 물체를 확대할 수 있다. 확대하고 확대하여 줄기세포조차 거대한 구조물처럼 보이는 그 순간, 기괴한 조형물은 ‘살아있는’ 미세물체임이 증명된다. ‘微生物’이 아니라 ‘未生物’인 이 의사유기체들은 생명 아닌 것이 어쩌면 생명일 수도 있다는 작가의 오래된 생각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 의사생물학이 끝은 아니다. 좀 더 깊이 관찰해보면 <미생물> 시리즈에서 말하는 ‘未生物’이란 ‘微生物’이 아닐뿐더러 ‘非生物’도 아니라는 이중 부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생물> 시리즈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생명에 대한 이기적 관점을 되돌아보게 하는 단순한 메커니즘을 넘어서 더 넓고 큰 시각을 갖게 해준다. 노진아의 ‘未生物’은 가변적인 다이너미즘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일테면 ‘지금은 생물이 아니지만, 시간 진행 과정의 어느 공간에서는 반드시 생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은 어쩌면 너무나 거대한 것이어서 우리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고 그 때문에 더욱 더 숭고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런 한에서 그 살아있는 거대한 체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살아있는 조직화에 기여하기에 당연히 생명의 다양한 양태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숲을 볼 수 없는” 우리에게 그것은 그저 신비주의적인 이설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느닷없이 던져진 “철가루… 너도 혹시 살아있니?”라는 치기어린 물음은 ‘숲이 있음’을 직감하는 이들에겐 알 수 없는 무게로 다가갈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또 다른 작품 <R1007 Series>(2005)는 <몸뚱어리 없는 대화>와 <엄마 mother>를 <미생물> 시리즈로 연결 짓는 징검다리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같다.노진아의 작업은 몇 년 전부터 몇 가지 의도를 관철시키려한다. 무엇보다도 전자 기계의 신체성(및 운동)과 생명에 대한 작가 자신의 관심을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관련지음으로써 살아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선 인공생명 이슈를 통해 테크놀로지의 도구성이라는 의미가 변화되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탈도구화된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분명 인공 생명체일 것이다.이러한 의도들의 구체적 형상화과정에서 (물론 더 눈여겨보아야 하겠지만) 노진아의 작업은 언젠가 도래할 법한 포스트-가이아(post-gaia) 시대를 저 멀리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거대한 생명체 지구에 유기체와 무기물 그리고 기계가 공생하는 세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