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시 명: ‘어느’의 지시성

○ 전시기간: 2015년 5월 6(수) ~ 2015년 5월 31일(일)

○ 전시장소: 자하미술관

○ 전시장르: 회화,설치,미디어,조각 등

○ 참여작가: 김종구, 노진아, 도학회, 백연수, 변경수, 송지인 이형욱, 정상현, 조정화, 최혜광, 장준혁, 연기백

소개 《‘어느’의 지시성》전 – ‘어느’에 부여된 지시성에 관하여 (미술사가 이상윤)

1986년 아시안 게임, 1987년 민주항쟁,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 등, 80년대의 한국은 격변의 시기를 지났다. 미술에서도 민주화 운동과 함께한 민중미술이 한 흐름을 형성하였고, 80년대 중반을 지날 무렵부터는 ‘순수’예술에서의 이데올로기 문제가 대두되면서 민중미술과 다른 한 쪽이 양극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 1980년대 끝자락을 잡고 시작된 모임이 바로 《어느 조각 모임》이다. 이렇듯 《어느 조각 모임》에 붙은 이 ‘어느’는 원래 이 단어가 지닌 단순한 의미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시대적 관점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어느’란, “둘 이상의 것 가운데 꼭 집어 말할 필요가 없는 막연한 사람이나 사물을 이를 때 사용하는 관형사”이다. 그러나 이 조각가들의 모임에 ‘어느’가 붙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느’에게 부여된 분명한 지시성 때문이었다. 1990년 《어느 조각 모임》이 결성되기 이전, ‘순수 예술’을 표방한 미술그룹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80년대 상황은 자의와 타의를 구분치 않고 ‘순수’가 가능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어느 조각 모임》 보다 앞 서 결성되었던 미술 그룹들은 이전의 민중미술에 대한 대응으로서 입지되었으며 이 때문에 1980년대 후반에는 민중미술과 새로운 움직임의 미술 그룹이 자연스레 대결 구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맥락에서 포스트모던적 다원주의의 맹아기라 할 수 있는 1990년대에 시작된, 미술에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벗어나, 순수한 조형 문제를 지향하였던 《어느 조각 모임》의 탄생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상적이라 할 만큼 미술에서의 순수성을 추구한 이들의 목적은 ‘어느’라는 단어 속에 그대로 담겨졌다. 바로 이것이 지시적 특성, 곧 ‘어느’의 지시성이다. 첫 전시를 열었던 1992년부터 지금까지, 《어느 조각 모임》은 미술에서, 그리고 조각에서, 20여 년 동안의 순수한 조형 실험들과 궤를 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 순수성은 양식상의 기계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내재적 동인, 즉 “예술의지(kunstwollen)”의 발현이라 하겠다. 이제 다시 2년 만에 열리게 된 《‘어느’의 지시성》展을 살펴보면, 총 다섯 분류로 나눌 수 있겠는데, 첫 번째는 다양한 물질성을 통해 추상적으로 재해석 된 새로운 풍경, 혹은 환상적 풍경을 보이고 있는 작품들로 김종구, 도학회, 최혜광이 이에 속하고, 둘째는 고도화된 산업사회를 반영하는 테크놀로지 아트(technology art)로서 노진아, 변경수가 이러한 경향에 포함된다. 세 번째는 상품 오브제(commodity object)를 변형, 재현한 작품을 통해 동시대에 당면한 이야기들을 담아낸 백연수, 송지인, 이형욱, 연기백이, 다음은 형상적인(figurative) 작품들로 특정 인물을 겨냥하기 보다는 특수함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다움(humanism)에 대해 논하고 있는 장준혁과 조정화의 작품이며, 이 분류에는 내용상으로 볼 때 앞 서 언급한 노진아와 변경수 또한 포함시킬 수도 있다. 마지막은 미술 담론과 연계된 작품을 들 수 있는데, 정상현의 작품이 이에 속하며, 입체/평면과 같은 조각에서의 조형언어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조정화의 작품 또한 부분적으로 이러한 예에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번 《‘어느’의 지시성》展에는 《어느 조각 모임》의 2, 3세대에 해당하는 작가들이 참여하여 이전과 또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차세대’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위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물질성을 지닌 재료와 매체들을 통해, 자신만의 조형의지를 촉매 삼아 각기 다른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미술 형식에서의 완전한 개방성을 지향하는 이러한 다원성이야말로 바로 《어느 조각 모임》에서의 ‘어느’가 지닌 또 하나의 지시성을 나타내 주는 면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