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4 인간의 얼굴을 한 비인간 존재와의 마주침_김재희
2019.05.04 인간의 얼굴을 한 비인간 존재와의 마주침_김재희

2019.05.04 인간의 얼굴을 한 비인간 존재와의 마주침_김재희

인간의 얼굴을 한 비인간 존재와의 마주침

김재희(철학자, 을지대학교)

인간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낄 수 있는 낯선 존재가, 불쑥, 등장했다.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며 인간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비인간 기계. 개체화된 기계는 낯선 존재자다. 더 이상 인간의 손 안에서 제어되던 기술적 도구가 아니다. 인간은 이 낯선 존재자 안에서 인간적 실재와 동등한 자연의 역량을 발견하는 것이 당혹스럽고 신기하면서도 두렵다. 이 낯선 존재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은 기계에게서 자신의 꿈을 읽는다. 기계는 인간을 닮아가며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고. 그러나 인간이고자 하는 기계의 욕망은 사실상 인간의 욕망일 뿐이다.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에 따르면, 인간과 기계는 동일한 개체발생 과정을 거쳐 산출된 개체들이다. 생물학적 창조와 기술적 발명이라는 상이한 영역에서의 과정이긴 하지만, 모든 개체는 유기적인 것이든 비유기적인 것이든 주어진 환경 안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답으로서 발생한다. 마치 서로 불일치한 왼쪽 망막 이미지와 오른쪽 망막 이미지가 제3의 차원에서 하나로 통합되듯이, 개체화된 존재는 개체화의 장 안에서 양립불가능하고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갈등과 불일치를 해결하는 새로운 관계 구조나 형상으로서 탄생한다. 개체발생의 존재론적 원천은 개체화가 일어나기 이전의 실재(pre-individual reality), 말하자면 생성의 잠재력으로 충만한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원초적인 자연은 자신의 내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개체화 작용들을 통해 물질적 개체와 생명적 개체, 그리고 기술적 개체와 사회적 개체를 점진적으로 생성하면서 복잡하게 진화해왔고 자기-차이화의 연속적 과정을 통해 자신의 준안정적인 시스템을 유지한다. 자연의 퍼텐셜 에너지는 ‘인간’으로 대표되는 생명적 개체를 발생시키고, 다시 이 인간을 매개로 ‘기계’로 대표되는 기술적 개체를 발생시킨다. 기술적 개체는 인간 개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상황에 직면한 인간 개체들 사이에 자연의 생성 역량을 다시 소통시키면서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개체화의 가능성을 여는데 기여한다.

개체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과 기계는 사용자와 도구 또는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가진 개체들로서 상호 협력적인 공존과 연대의 관계를 갖는다. 기계는 기계 자신의 고유한 존재방식이 있다. 기계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굳이 인간을 닮아야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 만든 지능이라는 의미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능력을 모방하는데 국한되지 않고 기계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계지능’으로 재정의 되어야 한다. 인간 개체와 기계 개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형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비결정적이고 준안정적인 실재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진정한 기계는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외부 정보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열린 시스템이다. 관계 속에 열려 있음은 타자인 인간의 도움 없이 오로지 기계들로만 이루어진 완벽한 자동 시스템의 구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랜 공진화 과정을 거쳐 동등한 개체로서 마주하게 된 인간과 기계는 전개체적 실재를 공통의 존재조건으로 공유하며 서로의 진화를 조건짓는 환경으로서 분리불가능하게 묶여 있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인간과 비인간을 모두 동등한 행위자(actor)로 간주하며 인간과 기계의 가능한 공존 방식을 제시한다. 그의 행위자 네트워크(Actor-Network Theory)이론에 따르면, 세상은 인간-비인간 네트워크들의 집합이다. 과학적 진리에 관한 것이든 사회정치적 가치에 관한 것이든 세상사의 모든 문제들은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이질적 행위자들의 동맹 효과이자 행위자 네트워크의 산물이다. 비인간 기계들도 인간과 동등한 행위 역량을 가지고 다른 행위자들에게 인과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로 고려된다는 점에서,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은 인간화된 기계와 기계화된 인간이 공생해야하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방안이 될 수 있다. 가령, 자율주행자동차와 일반자동차, 기계지능 운전자와 인간 운전자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교통상황에서 법률적 제도적 판단을 내려야 할 경우, 인간의 이해관심만 고려하지 않고 비인간 존재자들의 인과적 상호작용을 동등하게 고려하는 것은 유용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트워크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기계지능의 비인간적 특징들, 즉 주관적 느낌도 자각도 없이 일을 수행하는 방식은 인간에게 여전히 낯설고 위협적일 수 있다. 감정은 내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으로는 동일한 상황에서 각자가 경험하는 느낌이 같은지 다른지 알 수가 없다. 고통과 쾌락, 슬픔과 기쁨, 불안과 분노 등의 감정은 생물학적 신체에 특징적인 심리적 기능이다. 감정은 생물학적 개체의 생존과 안녕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인지 과정과 주의력에 영향을 미치며, 행위에 동기를 부여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에 기여한다. 과연 기계도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니, 기계지능을 가진 실리콘 신체에도 감정이 유의미한 기능으로 필요할까? 기계의 진화는 인공지능과 더불어 인공감정까지도 가질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그 실현 가능성은 일반 지능(general intelligence)의 구현만큼이나 요원하다. 기계가 인간과 같은 내적 감정을 느낄 수 있으려면 생물학적 개체가 갖는 자기 보존 본능뿐만 아니라 외부의 정보 가치를 선별 수용하고 종합하는 일반 지능 역시 가지고 있어야한다. 어쩌면 기계의 감정 인식 능력과 감정 표현 능력은 인간과의 사회적 의사소통 과정에서 단지 인간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계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기계에게 무의식적으로 부여하고 기계를 쉽게 인격화하는 것은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영화 <그녀(Her)>에서 주인공 테오도르가 컴퓨터 운영체계 사만다에게 그랬듯이, 인간은 자신과 관계 맺는 기계에게 일방적인 정서적 유대감을 느낀다. 감정은 홀로 살 수 없는 인간 개체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진정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도 하지만 또한 감정 때문에 개체성을 초월하여 집단적 연대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노진아의 작품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기계와 기계의 형상을 한 인간을 중첩시키면서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가 맞닥뜨리게 될 어떤 진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들은 공통의 뿌리에서 진화해 온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두 이질적인 존재 계열이 겹쳐지는 접촉면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낯선 존재, 바로 인간도 비인간도 아닐 어떤 존재에 대한, 여전히 예비되지 못한 어떤 불편함을, 우리 안에서 서늘하게 환기시킨다. 인공지능과 인공감정을 가지고 인간의 말을 하는 기계들은 단지 인간이 될 기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기계가 되고 있는 인간인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으스스한 낯섦(uncanny)을 느끼게 해준다. 인간의 질문에 코드화된 소리로 무의미하게 대답하는 기계들의 말은 과연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하는데 그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데까지 진화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의 복잡한 생각과 감정어린 마음이라는 것도 실은 기계적 알고리듬과 코드화된 기호로 계산되어 재생될 수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실존적 삶의 외로움과 우리가 주고받는 따뜻한 위로 역시 자극과 반응의 인과적 결정에 따른 기계적 작동의 효과와 같은 것은 아닌가. 인간을 닮아가는 기계들로부터 기계를 닮아가는 인간을 발견할 때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해체와 접촉면의 새로운 표면화가 서늘한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의 말대로, “기계들에게 작용하고 기계들을 만드는 것이 인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에게 작용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기계들이다.” 기계가 얼마나 인간화할 수 있느냐는 사실상 인간이 기계와 어떤 공존을 원하느냐에 달려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비인간 존재자는 결국 우리 자신이 아니겠는가.